#305(06/27/20) “편한 마음”

license

수정이가 운전면허증 드라이빙 테스트에서 합격했습니다. 내가 운전 연습을 시킨 적이 있었지만 역시 가족끼리 운전 연습을 도와 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이번에 드라이빙스쿨을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면허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면허시험에 합격했어도 운전 감각을 잃지 않도록 수정이에게 엄마 운전대를 맡겨서 센터빌 마트까지 운전하도록 했습니다. 조수석에 내가 앉았습니다. 앉자 마자 위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본능적으로요. 손잡이를 움켜 나를 보면서 수정이가 연신 웃습니다. 수정이를 믿어보자고 핸들을 맡겼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마 초보 운전자 옆에 앉아 경험이 있는 분들은 심정을 겁니다. 아내는 뒤에 앉아서 계속 교통 표지판이나 사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걱정스레 말해 줍니다. 운전하는 딸도 긴장이 많이 되었겠지만, 나와 아내도 함께 긴장되는 드라이빙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운전할 때는 모든 가족들이 안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게임하고, 자기도 하고, 이야기도 합니다. 안에 손잡이를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생각에는 운전자를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한 행동들이 나옵니다. 자유롭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이렇게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근심, 걱정,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주위에 있는 사람도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상황들이 비일비재할까요? 조바심 가운데 어쩔 모를까요? 마치 안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마음과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보여 집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이 자신이면 문제입니다. 나를 믿고 인생의 운전대를 나에게 주면 마음의 불안정해지기 쉽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초보 운전자가 인생을 운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일 우리의 마음은 편해질 있습니다. 반석 위에 있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땅에 오셨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근심’ ‘두려움등은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잃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만일 편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신앙의 여정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자신,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의 운전대를 하나님께 확실히 맡기면서 걸어가 봅시다. 최고의 드라이버되신 우리 주님께서 최선의 길로 우릴 인도하실 믿습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304(06/20/20) “하나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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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하나님의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지 알고 계시나요? 직관적으로 어떤 행위가 먼저 오를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28-29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을 모두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 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마태복음 16 21-28절에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하자 마자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에서 절대 돌아가셔서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며 외칩니다. 그렇게 외치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전혀 생각지 않은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회복시킬 위대한 정치 지도자요 영웅정도로 생각했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시킬 그리스도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빠져서 위대한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의 영광을 밝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한 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이라면 우리도 본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고 적용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자로서 하나님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생각하며 살아갈 우리에게도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받으려는 제자의 첫번째 조건은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예견된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목숨도 요구하는 상황이 있을 있습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하나님의 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박아 죽이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사람의 이요, 소리가 납니다. 아직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서 말이죠. 그러면 영광의 부활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303(06/13/20) “쓰면 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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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2 마일 달리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근력 운동도 중요하지만 호기성 운동도 병행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오랜만에 트랙에서 달려보니 많이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직선코스에서는 뛰고, 곡선코스에서는 걷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달리기 하는 것은 할만 했습니다. 4일정도 반복해서 동일한 패턴으로 달리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같은 패턴으로 달리려고 하다가 뛸만해서 곡선코스에서도 뛰었습니다. 그렇게 바퀴를 돌았는데도 괜찮아서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곡선코스에서 다시 걸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바퀴씩 번을 달렸는데 몸이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목표하는 시간은 도달하지 못했지만 다른 목표가 생겼습니다. 다음 번에는 3바퀴씩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퀴씩 점차 늘려가서 6바퀴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렇게 몸의 폐활량이 어느새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은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무리해서 쓰면 안되겠지만요. 하지만 나의 한계에서 조금씩 늘려 나가면 몸은 적응해 나가며 기능이 좋아진다는 느낌을 달리기를 통해서 느낄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가만히 있고 뒤로 쳐지는 것을 권하지 않는 같습니다. 대신에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열매를 맺고, 경주를 하고, 그리고 선한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특히, 믿음의 경주는 그렇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어쩌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나의 옛사람과의 싸움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추구했던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때론 힘이 부칩니다. 실망도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적 싸움인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나의 다른 모습을 보게 믿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나의 죄성들이 이상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가뿐해 집니다.  영적인 즐거움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지경과 높이도 점점 나아질 있습니다. 영적인 달리기도 영적인 근육을 쓰면 쓸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영적인 경주, 싸움의 목표는 피를 흘릴 정도의 치열한 영적 싸움일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12:4). 목표를 잃지 않고 영적인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주님 만날 때까지 말이죠.


(12: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302(06/06/20) “퇴색(退色)”

looting

수정이 픽업하러 저녁에 나가는데 할머니가 뛰어 나와서 길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위가 있어서 위험하답니다. 이웃에 사는 한국 분도 데모가 가까이서 있으니 조심하라고 아내에게 카톡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목사님께서 페어펙스 지역 데모 일정과 함께, ‘특히 매나사스 지역은 가지말아야 한대요하는 내용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국에 번졌습니다. 어쨌든 고귀한 생명이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분을 살만한 사건이 벌여졌습니다. 심지어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경찰들도 무릎을 꿇고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시위를 하는 흑인 청년을 안아 주는 경찰의 모습도 찍혔습니다. 억울한 죽음에 시위대와 경찰이 공감하는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일부 시위대는 저녁만 되면 파괴, 방화, 약탈, 그리고 폭력을 행사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운 곳의 AT&T 대리점도 유리창이 깨져서 나무로 막아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걱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시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잘못된 행동들입니다. ‘퇴색 사전적인 의미는 빛이나 색이 바라거나 존재가 희미해지거나 볼품없어지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불순한 세력들이 시위대의 켠에 있는 같습니다.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생명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생명만, 그리고 인종의 생명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폭력도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나아가 생각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폭력을 정당화할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 또는 언어적인 폭력이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퇴색되지 않으려면 이면에는 ‘All Lives Matter’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구호라도 퇴색될 있습니다. 이러한 퇴색을 걱정하는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도 뉴스에 나왔습니다. 약탈하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타겟이라는 대형마트 앞에서 여러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는 장면입니다.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외침에 힘을 빼는 일부 미숙하고, 편협하고, 그리고 탐욕스런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셔서 아들을 땅에 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몸이 되었고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301(05/30/20) “보호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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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05/30/20) “보호하심


 양이나 염소가 울타리를 벗어나 야생으로 달아나면 주인의 보호를 받을 없습니다. 들짐승들의 먹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성경에서 남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그들을 향해 다시 하나님께 돌아 오라고 외쳤던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남유다의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당시의 최고 강대국은 바벨론이었고 그들의 침략을 받아 남유다는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벨론이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고, 성을 빼앗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이유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따른 적이 없는 항상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포로된 남유다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께 돌아와서 착해졌다는 글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묵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약속하심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버리면 어쩔 없이 보호의 손을 동안 거두시지만, 다시 보호의 손으로 품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보호의 손을 거두시면 야생에 던져진 양과 같아 보입니다. 상처 투성이가 됩니다. 죽을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다시 손을 펴서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잠시 나를 채찍질하던 도구로 쓰임받은 대적들이 물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호하심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 항상 있어왔음을 느끼게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약속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하거나 나의 죄로 인한 시련과 고통과 아픔이 찾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게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평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끈질기게 보호하신다고 말이죠.

 (13:5)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과 능력을 인정하고 의식하며 살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술의 고백이 진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 눈에 의인이며 의인처럼 여겨지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은 영원히 보호해 주실 믿습니다.


(91:1-2)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

#300(05/23/20) “습관”

관성

#300(05/23/20) “습관


COVID-19 인해 여러 모임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잔치, 결혼식, 생일잔치, 장례식 그리고 교회 예배 모임 등이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미팅이나 교육 등이 화상대화 프로그램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뉴스 진행자들도 각자의 집에서 진행하는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각한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대안으로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은 현재 필수적입니다.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가지 우려를 떨칠 없습니다. 그것은 바이러스가 잠잠해 후에 일어날 사람들의 의식 변화입니다. 동안 온라인을 통한 문화에 익숙해져서 예배를 단지 동영상으로 대체해도 괜찮겠다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온라인 상의 화상대화를 통한 여러 모임이 좋아 보이고 편해집니다. 화면에 모든 사람의 모습을 있고, 가장 가까이서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존경하는 목사님의 얼굴을 앞에 놓고서 말씀을 들을 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온라인 예배가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면 한편으로 놓치는 것이 있을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인터넷이라는 랜선을 통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공간과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몸된 교회의 의미가 퇴색되어질 있다는 사실입니다.


버스를 타고 서서 가는 사람이 버스가 갑자기 서면 앞으로 넘어지는 것은 관성이라는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내가 무엇인가 계속하고 있을 때는 그것에 이미 익숙해 있습니다. 그리고 익숙해져 있는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습관입니다. 좋든 좋든 우리 자신은 항상 보이지 않는 무엇에 그렇게 습관이 들여져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상황에서 대안일 뿐인데도 익숙한 습관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5절에는 마지막 때에 만연할 습관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점점 사라질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 시대에는 세상의 핍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갖는 것이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금방 오실 것으로 생각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에 더욱 힘써야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COVID-19 감염을 무릅쓰고 모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우려로 끝났으면 하는 것은 온라인 모임이 습관이 되서 감염의 위험이 사라졌는데도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 모임을 대체할 있다는 다른 바이러스 같은 생각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는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라고 만드신 기관입니다. COVID-19 물러갔을 오히려 모임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기를 시간 기도 드립니다.


(10:24-25) 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