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08/08/20) “하나님의 일들”

goodshephard

사람들은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는 이럴까?” “내가 나아질 있을까?” “아무리 해봐도 안되네..”하면서 말이죠. 시편 77편을 아삽도 그런 생각을 적이 있었던 같습니다. 하지만 아삽은 이러한 자기 연민이 자신의 문제임을 발견합니다. 지혜로운 아삽의 모습입니다. 아삽은 현재 자신이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시각을 하나님께로 주저 없이 전환합니다.

그래서 시편 77 1절부터 9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아삽은 10절에서 20절까지 하나님’ ‘주님 20회나 사용하여 시각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아삽이 주님께 방향을 돌리면서 함께 바꾼 것은 바로 그의 생각이었습다. 11-12절까지 보면 그는 기억하겠습니다” “되뇌이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뇌이겠다는 걸까요?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오래 전에 행하신 기이한 모든 일들을 입으로 소리내며 되뇌이겠다고 합니다. 당장 앞에 크고 기이한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과거에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 현재 나의 상황에 힘과 용기를 있음을 믿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하나님을 반쪽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일을 다시 깊이 생각하겠다는 놀라운 실제적인 고백입니다. 영원토록 임재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고백입니다. 아삽이 하나님을 13절에서 고백합니다.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다고 말이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극히 구별된 일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일 것입니다. 20절에 하나님께서 모세, 아론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일을 아삽은 다시 묵상하며 기억하는 것을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민족적인 은혜를 잊지 않으며 매일을 살아가는 아삽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들도 자기 연민 가운데 슬픔과 고통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있습니다. 때마다 아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자가 무리를 인도하듯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무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모든 고난과 두려움을 이겨냈듯이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어떤 고난과 두려움도 넉넉히 이길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현재 당면한 고난을 보기보다는 과거에 나의 고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씩 기억하고 소리 내어 고백하는 놀라운 기적의 일상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77:11-22) “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310(08/01/20) “걸림돌”

stone

초등학교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오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다친 무릎의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돌부리 같은 걸림돌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합니다. 이러한 걸림돌을 두기도 하고 걸림돌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3장에서 걸림돌 같은 그들을 향해 있을진저라고 일곱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포장된 의로운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심판 받아 마땅한 복음의 걸림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나 저주하신 이유 첫번 째는 구원받을 자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 수도 없었지만 믿어서 천국 있는 사람들까지 훼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보다 율법적이고 외식적인 사람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신들도 지기 힘든 여러 율법들을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메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두번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자와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어느 것이 큰가?”하는 질문입니다.  ‘또는 성전그리고 예물또는 제단중에서 어떤 것이 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답은 성전, ‘제단으로 맹세하면 효과가 없고, ‘,’ ‘예물 가져와서 맹세해야 효과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음에도 말이죠. 사실 금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성전 때문에, 예물은 거룩한 제단 때문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은 탐욕으로 가득 있어서 그런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심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처럼 탐욕스런 분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조차도 몰랐던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저주를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알렸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걸림돌을 너무 싫어하십니다. 만일 나의 , 행동, 그리고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지 않고, 말씀을 왜곡한 가치관이 전달된다면 나는 예수님이 보기에 걸림돌일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깨끗하게 산다 해도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 살면서 작은 얼룩이라도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사명이 있다면 가운데 있는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걸림돌 아닌 디딤돌 되는 것입니다. 보다 멋있는 예수님의 제자를 나오게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9:31-32)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09(07/24/20) “하지만”

family

해는 한국에 마지막으로 갔다 온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해는 어머니께서 세가 되는 해여서 한국에 다녀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한국에서 어머니 생신도 가족들만 모였습니다. 한국도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하고 있어서인지 가족들도 마스크를 쓰고 음식점에 모여서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는 모습을 있었습니다. 축하하는 자리를 사진으로만 있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가족이 자리에 모인 시간이 많아져서 좋습니다. 찬욱이에 이어서 작년에 수정이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에는 아내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집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수정이가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지난 3월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찬욱이는 이번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10월에 출근할 때까지 집에 있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재택근무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다시 집에 이야기 꽃이 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도 괜찮습니다. 집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미국에서 우리 가족은 다시 모이는 기회가 되어서 좋습니다.

하지만 앞의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을 말할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좋은 내용이 앞에 나오면 뒤에는 좋은 내용이 나오고, 앞에 부정적인 내용이 나오면 뒤에는 긍정적인 내용을 기술할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는 우리가 균형 잡힌 생각을 있도록 도와 줍니다. 양면을 있도록 도와주는 같습니다. 물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해 사용하면 안되겠지요. 특히 좋은 일이나 어려움과 역경이 찾아왔을 하지만하면서 좋은 것을 생각하는 훈련을 하면 좋을 같습니다. 이런 마음의 여유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좋을 같습니다. 답답하고 힘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하늘 아버지께 고정하면서 하지만하면 좋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험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 핍박과 심지어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방인인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나 신앙의 여정 가운데 남모를 힘든 일이 닥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에, 머리를 주님의 말씀에, 손을 주님의 섬김에 다시 순종하며 걸어가면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믿습니다. ‘하지만하면서 다시 가장 좋으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08(07/18/20) “근심”

peace

  세상에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COVID-19이란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근심이 하나 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심은 가지 양면성이 있음을 고린도후서 7:2-16절을 통해 발견할 있습니다. 가지 양면성은 근심하는 것이 무익할 수도 있고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기자들도 가지 면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근심은 몸과 영을 쇠하게 한다”(31:9) 반면 전도서 기자는 근심은 마음을 좋게 한다”(7:3)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근심을 무익한 세상 근심과 하나님 뜻대로 하는 유익한 근심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 근심이 있는 이것은 사망을 이룬다 합니다.(10)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육신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여전히 건강, , 명예, 증오, 탐욕 등으로 인한 세상적인 근심에 언제나 초연할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너무 매여서 근심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사망을 이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근심은 무익합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나서 근심에 빠진 사람은 원망하기 쉽고 죄를 감추려다 보면 초조해 하고 근심에 사로 잡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악해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담이 범죄하고 죄를 은폐할 , 사울이 잘못된 제사를 드릴 ,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남편을 죽였을 그러한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죄를 짓고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근심의 그늘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다릅니다. 10 상반절에 근심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룬다고 합니다. 영적인 근심이 있으며 이것은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 전도를 위해, 그리고 헌신과 섬김을 위한 거룩하고 영적인 근심은 성도에게 후회할 것이 없게 만듭니다. 유익합니다. 주님을 위해 애쓰는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유익한 것은 회개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불신앙, 나태함, 욕망 등을 하나님 앞에서 비춰보고 현재 상태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돌이킵니다. 이러한 마음은 이미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과정 가운데 있는 마음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통회 자복할 오히려 구원의 기쁨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믿습니다. 근심도 근심 나름입니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307(07/11/20) “상록수(evergreen)”

arborviate

저는 상록수를 좋아합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향나무 등을 말이죠. 그래서 매나사스(Manassas) 처음 이사 왔을 , 있는 그루의 측백나무(향나무와 비슷함) 보고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사 온지 7 동안 나무는 언제나 푸르름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초부터 가운데 있는 나무가 갈색으로 변해 갔습니다. 일시적인 현상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나무를 무심코 보니 조그만 솔방울같이 생긴 것이 움직이는 같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엇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움직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벌레였습니다. 아주 작은 솔방울 같은 안에 숨어 있는 벌레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것들이 나무 전체에 온통 퍼져 있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벌레 천지였습니다. “내가 이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백웜(bagworm, 도롱이벌레)이라는 벌레였습니다. 벌레를 없애지 않으면 푸르름을 자랑하는 상록수도 죽을 있다는 설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홈디포(Home Depot) 가서 해충약을 사다가 뿌렸습니다. 측백나무 그루에 모두 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록수에 좋은 영양제도 주문을 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나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무관심에 어느새 상록수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무관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영적, 정서적인 무관심이 나를 병들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사람이라 해도 순간에 무너질 있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가끔 뉴스에도 그런 인간의 모습이 전해 지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 넘어 가면 영혼이 먹게 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소문난 사람도 모래성처럼 무너질 있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성경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격하는 영적 존재로서 사탄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안이함과 무관심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리고 익숙해 지면 일입니다. 걷잡을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영혼을 주님의 강렬한 빛에 쪼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이고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영혼을 날마다 소독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정결해지면서 회복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사철 푸른 신앙을 누릴 있습니다. 이처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변함없는 믿음 생활을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을 상록수 신앙생활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06(07/04/20) “버티기”

taekwon

최근에 신문에서 막노동하는 노태권씨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난독증이 있는 그는 중졸입니다. 중학생인 아들이 어버이 날에 우리 아빠는 무식하고 없는 막노동꾼이다라고 카드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40 중반에 아내의 도움으로 한글을 그는 공부에 도전해서 수능 모의고사를 만점 받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에 빠져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함께 걷고, 5분씩 집중 시간을 늘려서 결국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진학시켰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버텨야 한다 마음을 전하기 위해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목적을 이루는 것은 어렵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버티기입니다. 공부하는 뿐만 아니라, 직장, 가정, 그리고 사역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는 것은 마음과 몸이 힘들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버티기입니다. 인내 또는 참는 것입니다. 만일 버티는 과정에서 내가 하지 않았던 일이나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면 힘들 있습니다. 며칠 전에 아들 문짝과 창틀, 그리고 천정 일부를 페인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정을 보기 위해 머리를 뒤로 치고, 팔을 높이 들어서 색칠을 하다 보니 힘들었습니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근육을 썼기 때문입니다. 만일 버티지 않았다면 색칠을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좋고 선한 목적은 누구나 생각하고 꿈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까지 버티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구원의 목적을 위해 땅에 오셨습니다. 거룩한 목적을 이루는 길은 가시밭 , 고난의 , 그리고 조롱받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써 처음 가신 길이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인간을 누구보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배신조차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사역 가운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까지도 참고 버티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고난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음을 나누는 자로서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목적 가운데 각자의 고난이 있을 있습니다. 고난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고난이요, 하늘 상급이 넘치는 고난이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믿음 안에서 버티기라고 생각합니다.

(12:13) “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305(06/27/20) “편한 마음”

license

수정이가 운전면허증 드라이빙 테스트에서 합격했습니다. 내가 운전 연습을 시킨 적이 있었지만 역시 가족끼리 운전 연습을 도와 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이번에 드라이빙스쿨을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면허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면허시험에 합격했어도 운전 감각을 잃지 않도록 수정이에게 엄마 운전대를 맡겨서 센터빌 마트까지 운전하도록 했습니다. 조수석에 내가 앉았습니다. 앉자 마자 위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본능적으로요. 손잡이를 움켜 나를 보면서 수정이가 연신 웃습니다. 수정이를 믿어보자고 핸들을 맡겼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마 초보 운전자 옆에 앉아 경험이 있는 분들은 심정을 겁니다. 아내는 뒤에 앉아서 계속 교통 표지판이나 사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걱정스레 말해 줍니다. 운전하는 딸도 긴장이 많이 되었겠지만, 나와 아내도 함께 긴장되는 드라이빙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운전할 때는 모든 가족들이 안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게임하고, 자기도 하고, 이야기도 합니다. 안에 손잡이를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생각에는 운전자를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한 행동들이 나옵니다. 자유롭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이렇게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근심, 걱정,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주위에 있는 사람도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상황들이 비일비재할까요? 조바심 가운데 어쩔 모를까요? 마치 안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마음과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보여 집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이 자신이면 문제입니다. 나를 믿고 인생의 운전대를 나에게 주면 마음의 불안정해지기 쉽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초보 운전자가 인생을 운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일 우리의 마음은 편해질 있습니다. 반석 위에 있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땅에 오셨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근심’ ‘두려움등은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잃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만일 편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신앙의 여정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자신,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의 운전대를 하나님께 확실히 맡기면서 걸어가 봅시다. 최고의 드라이버되신 우리 주님께서 최선의 길로 우릴 인도하실 믿습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304(06/20/20) “하나님의 일”

workofGod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하나님의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지 알고 계시나요? 직관적으로 어떤 행위가 먼저 오를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28-29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을 모두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 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마태복음 16 21-28절에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하자 마자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에서 절대 돌아가셔서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며 외칩니다. 그렇게 외치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전혀 생각지 않은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회복시킬 위대한 정치 지도자요 영웅정도로 생각했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시킬 그리스도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빠져서 위대한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의 영광을 밝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한 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이라면 우리도 본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고 적용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자로서 하나님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생각하며 살아갈 우리에게도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받으려는 제자의 첫번째 조건은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예견된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목숨도 요구하는 상황이 있을 있습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하나님의 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박아 죽이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사람의 이요, 소리가 납니다. 아직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서 말이죠. 그러면 영광의 부활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303(06/13/20) “쓰면 쓸수록”

running

최근에 2 마일 달리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근력 운동도 중요하지만 호기성 운동도 병행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오랜만에 트랙에서 달려보니 많이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직선코스에서는 뛰고, 곡선코스에서는 걷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달리기 하는 것은 할만 했습니다. 4일정도 반복해서 동일한 패턴으로 달리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같은 패턴으로 달리려고 하다가 뛸만해서 곡선코스에서도 뛰었습니다. 그렇게 바퀴를 돌았는데도 괜찮아서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곡선코스에서 다시 걸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바퀴씩 번을 달렸는데 몸이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목표하는 시간은 도달하지 못했지만 다른 목표가 생겼습니다. 다음 번에는 3바퀴씩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퀴씩 점차 늘려가서 6바퀴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렇게 몸의 폐활량이 어느새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은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무리해서 쓰면 안되겠지만요. 하지만 나의 한계에서 조금씩 늘려 나가면 몸은 적응해 나가며 기능이 좋아진다는 느낌을 달리기를 통해서 느낄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가만히 있고 뒤로 쳐지는 것을 권하지 않는 같습니다. 대신에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열매를 맺고, 경주를 하고, 그리고 선한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특히, 믿음의 경주는 그렇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어쩌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나의 옛사람과의 싸움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추구했던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때론 힘이 부칩니다. 실망도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적 싸움인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나의 다른 모습을 보게 믿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나의 죄성들이 이상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가뿐해 집니다.  영적인 즐거움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지경과 높이도 점점 나아질 있습니다. 영적인 달리기도 영적인 근육을 쓰면 쓸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영적인 경주, 싸움의 목표는 피를 흘릴 정도의 치열한 영적 싸움일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12:4). 목표를 잃지 않고 영적인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주님 만날 때까지 말이죠.


(12: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302(06/06/20) “퇴색(退色)”

looting

수정이 픽업하러 저녁에 나가는데 할머니가 뛰어 나와서 길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위가 있어서 위험하답니다. 이웃에 사는 한국 분도 데모가 가까이서 있으니 조심하라고 아내에게 카톡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목사님께서 페어펙스 지역 데모 일정과 함께, ‘특히 매나사스 지역은 가지말아야 한대요하는 내용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국에 번졌습니다. 어쨌든 고귀한 생명이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분을 살만한 사건이 벌여졌습니다. 심지어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경찰들도 무릎을 꿇고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시위를 하는 흑인 청년을 안아 주는 경찰의 모습도 찍혔습니다. 억울한 죽음에 시위대와 경찰이 공감하는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일부 시위대는 저녁만 되면 파괴, 방화, 약탈, 그리고 폭력을 행사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운 곳의 AT&T 대리점도 유리창이 깨져서 나무로 막아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걱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시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잘못된 행동들입니다. ‘퇴색 사전적인 의미는 빛이나 색이 바라거나 존재가 희미해지거나 볼품없어지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불순한 세력들이 시위대의 켠에 있는 같습니다.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생명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생명만, 그리고 인종의 생명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폭력도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나아가 생각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폭력을 정당화할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 또는 언어적인 폭력이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퇴색되지 않으려면 이면에는 ‘All Lives Matter’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구호라도 퇴색될 있습니다. 이러한 퇴색을 걱정하는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도 뉴스에 나왔습니다. 약탈하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타겟이라는 대형마트 앞에서 여러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는 장면입니다.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외침에 힘을 빼는 일부 미숙하고, 편협하고, 그리고 탐욕스런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셔서 아들을 땅에 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몸이 되었고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